주흘관은 1708년에 건립되었다. 세 개의 문 중에서 가장 모양이 많다. 양쪽으로 잡혀 있던 성곽도 비교적 온전하며, 하천수 자연 흐름을 따라 수문까지 설치돼 있다. 남쪽을 마주보고 있는 성벽의 동쪽에는 높은 곳에 큰 돌이 있는데, 이인성이 다시 지은 『경종 원년』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그 아래에는 석수의 우두머리인 도석수 송성원, 이영우, 강두정 등의 이름이 적혀 있다. 그들의 지도 아래 수많은 석공들과 역공들이 돌을 깎고 돌을 나르고 끌을 쪼아 귀에다 쌓아 지금처럼 견고한 벽을 만들었을 것이다. 그들의 땀은 그 돌 하나하나에 스며들 것이다. 이 비문 외에도 주흘관 벽면에는 재건 기록이 남아 있다. 이들은 각각 1748년(영조 28)에 태어났다. 경진과 병술의 간판은 고종 17년(1880년)과 고..
새재고개는 대낮에도 사람이 모일 수 없을 정도로 험하고 높았고, 날이 어두워지면 그 다음날을 넘기기 전에 하루 밤을 밑바닥에서 지내야 한다고 했다. 울퉁불퉁한 탓에 새의 이름은 '새재'([])라는 뜻에서 '새재'(鳥在)가 되었고, '새재'라는 뜻에서 '새재'(."在)가 되었다고 한다. 반면 조령산과 주 을사른산의 날카로운 계곡에서 나오는 '굴곡'으로 만든 길이라 'sae재'가 되었다고 한다. 경상도에서는 '새'라는 은빛 풀이 많아 '새매'라고도 불렸으며, 이름에 따라 한자어로 '조석'이라고도 불렸다. 그래서 그런지 모두 '새재'라고 한다." 새재에는 산신각과 성황당이 많다. 지금도 세재 아랫마을에 사는 사람들은 온 마음을 다해 산신과 신성한 황제신에게 제사를 드린다. 이 마을 풍습이 남아있을 수 있었다는..
해안들이 백두대간 donghae 늘어날 때까지 그는 남서부로 탈바꿈하기 위해태백산에 도착했다. 고갯길은 풍기와 단양을 잇는 죽령(689m), 문경과 충주를 잇는 새재(632m), 이화령(548m), 계립령(520m) 등이다. 계십령과 죽령은 삼국시대에 개척되었다. 새재는 이제 옛길이었지만 조선에서 마지막으로 개통되는 '새로운 길'이었다. 이화령은 세재의 옆구리를 쓸어버린 '신작로'이다. 다른 고갯길과 마찬가지로 특히 새재는 서울로 통하는 관문이었다. 조선 시대에는 한양(漢陽)이 전국을 연결하는 체제의 중심지였다. 6개 대로 중 하나인 이 길은 동래와 한양을 연결하는 가장 빠른 길로 개척되었다. 현재 경부고속도로에서 380km 떨어진 데 비해 서울에서 부산까지는 428km. 그래서 조선 시대 내내 세재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