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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흘관은 1708년에 건립되었다. 세 개의 문 중에서 가장 모양이 많다. 양쪽으로 잡혀 있던 성곽도 비교적 온전하며, 하천수 자연 흐름을 따라 수문까지 설치돼 있다. 남쪽을 마주보고 있는 성벽의 동쪽에는 높은 곳에 큰 돌이 있는데, 이인성이 다시 지은 『경종 원년』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그 아래에는 석수의 우두머리인 도석수 송성원, 이영우, 강두정 등의 이름이 적혀 있다. 그들의 지도 아래 수많은 석공들과 역공들이 돌을 깎고 돌을 나르고 끌을 쪼아 귀에다 쌓아 지금처럼 견고한 벽을 만들었을 것이다. 그들의 땀은 그 돌 하나하나에 스며들 것이다. 이 비문 외에도 주흘관 벽면에는 재건 기록이 남아 있다. 이들은 각각 1748년(영조 28)에 태어났다.


경진과 병술의 간판은 고종 17년(1880년)과 고종 23년(1886년)을 가리키는 것으로도 보인다. 조선 후기와 근대에 성곽의 개조를 막기 위한 시도는 무엇이었을까? 문경관문에는 1728년 이인좌의 난과 1871년 경북 영해 동학 때 대규모로 병사들이 주둔하였다. 1907년 제2, 제3의 관문은 국권을 되찾기 위해 일어선 의병을 물리친 징벌군에 의해 훼손되었다.


가파르게 쌓은 외벽과 달리 내부에 여러 겹의 층을 쌓아서 쉽게 성벽 꼭대기까지 올라가 적을 막을 수 있도록 하였다.


네모난 돌의 네 귀 또는 꼬인 벽에는 '辛丑'(1721년)에 별장 이인성이 재건되었다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대문으로 들어서면 동쪽에 꽤 큰 집이 있다. 새 황제를 모시는 사당이다. 상량문에 따르면 숙종 26년(1700년)에 중건된 뒤 헌종 10년(1844년)에 중건한 것으로 보아 중량이 길어야 300년, 길어야 150년이라는 뜻이다. 성당 안에는 아름다운 여신상이 모셔져 있고, 조선 인조의 유명한 신 최명길에 대한 전설이 전해진다.


몇 걸음 앞으로 나가면 비석이 무성하다. 전국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선발비용이다. 조선시대에는 지방 관료가 분단될 때 비석을 세우는 것이 관례였다. 이것은 보통 지역 주민들이 주도했지만 비용은 전적으로 국민의 몫이었다. 정말 국민을 아끼는 목민관보다 이런 허식적인 '공영심'을 중시하면 할수록 오히려 불편을 끼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관찰자와 현암도 오보에 대한 책임이 있다. 석비 중에는 철비까지 있다. 큰 선발비, 송덕비, 중소기업 얼마나 많은 "선택"이 주어졌는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 석비를 세우기 위해 피와 땀과 눈물을 쏟았는가? 그러는 동안, 그 사이에 있는 전나무 기념비는 다른 것들보다 다소 좋아 보인다. 1978년 무너진 600년 된 전나무를 기리기 위해 지은 것이다.


대문을 잇는 새재길을 산속의 조용한 오솔길로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지 않다. 관광지로 개발되어 폭 5m 정도의 흙길로 꾸며졌다. 구태의연한 이목구비가 매우 귀하게 되었다. 차들이 서로 조심스럽게 건널 수 있을 정도로 도로가 넓지만 차량 통행이 금지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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