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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재고개는 대낮에도 사람이 모일 수 없을 정도로 험하고 높았고, 날이 어두워지면 그 다음날을 넘기기 전에 하루 밤을 밑바닥에서 지내야 한다고 했다. 울퉁불퉁한 탓에 새의 이름은 '새재'([])라는 뜻에서 '새재'(鳥在)가 되었고, '새재'라는 뜻에서 '새재'(."在)가 되었다고 한다. 반면 조령산과 주 을사른산의 날카로운 계곡에서 나오는 '굴곡'으로 만든 길이라 'sae재'가 되었다고 한다. 경상도에서는 '새'라는 은빛 풀이 많아 '새매'라고도 불렸으며, 이름에 따라 한자어로 '조석'이라고도 불렸다. 그래서 그런지 모두 '새재'라고 한다."


새재에는 산신각과 성황당이 많다. 지금도 세재 아랫마을에 사는 사람들은 온 마음을 다해 산신과 신성한 황제신에게 제사를 드린다. 이 마을 풍습이 남아있을 수 있었다는 것은 이곳이 그만큼 변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새재 일대는 낙동강 유역과 한강 유역을 잇는 곳이어서 삼국시대부터 많은 산성이 쌓였다. 이 가운데 조령성 축성은 임진왜란 이후 시작되어 숙종 때 완공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새재는 매우 중요한 지점으로 여겨졌다. 임진왜란 이전에는 일본군에 대비하여 성을 쌓아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으나 실행되지 않았다. 그리고 왜구가 쳐들어오자 신립 장군은 충주 탄금대에 배수진을 쳤다. 일본군은 죽령, 새재, 추풍령 등 3개 사단으로 나뉘어 있었다. 그 중 주력부대는 새재에 도착했을 때 투박함에 놀란 새재 방향으로 진로를 정했지만 전혀 방어가 되지 않아 아무 어려움 없이 이곳을 통과했다. 신립 장군은 탄금대에 이르러서야 신립군과 접전을 벌였다. 이 싸움에서 신립 장군은 목숨을 바쳤으나 패배했고, 일본군은 곧장 서울로 진격했다. 신관이 개방되지 않았다면 임진왜란으로 수도가 함락되는 등 큰 피해를 입히지 않았을 것이므로 한양 보호를 위한 중요한 관문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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