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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들의 노랫소리를 들으며 걷다 보면 제3의 대문(조령관)이 우뚝 서 있다. 임진왜란 직후 제2대문(조곡관)이 건립된 데 비해 1708년(숙종 34)에 건립된 기념관이다. 그러나 숙종 때인 1907년 의병전쟁 때 문루가 불타 1976년 홍예문, 그 위 정자, 좌우 135m의 돌담 등이 복원되었다. 조령관 근처에는 산신각과 약수역이 있어 시원한 물로 갈증을 해소하고 가볼 만하다. 이 약수는 1708년 조령성 축조 때 발견되어 역사가 깊고 사계절의 수온이 일정하여 한겨울에도 얼지 않는다고 한다. 무수한 노상강도들에게 달콤하고 시원한 에너지 회복제 역할을 한 지 몇 년이나 되었을까. 조령관에서 조령성 북문으로 가는 동행 노선은 충주시 상모면 미륵리로 이어지고, 지금은 미륵대원과 함께 등산로가 이어져 결국 질음재로 이어진다.


문경새재 고갯마루에 조성된 대문은 이곳을 기준으로 영남과 충청이 양분되어 있다.

약수 위의 작은 정자를 산신각이라 하는데, 이 이야기가 거기서 전해진다. 신재가 개척된 직후, 궁중에 올려놓을 수 있는 공예품을 들고 있던 한 병사가 호랑이에게 화를 냈다. 담장이 전달되지 않자 충주목사는 남자를 열어 피투성이가 된 옷을 찾아냈다. 나는 그것을 궁중에 보고했고 왕은 화가 나서 "호랑이를 당장 잡아라"고 소리쳤다. 100명의 군사가 수색하였으나 찾지 못하자 제사를 지내고 대신 왕명을 내렸다. 이튿날 새벽에 돌아가니 칙령을 본 호랑이가 목을 매 자살했다. 이후 호랑이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절을 짓고 해마다 제사를 지냈다. 그 후 호랑이는 새 잿더미 속으로 사라졌다. 사연이 워낙 많은 문경새재는 가벼운 등산으로 제격이고, 계절이 바뀔 때마다 찾는 사람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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