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해안들이 백두대간 donghae 늘어날 때까지 그는 남서부로 탈바꿈하기 위해태백산에 도착했다. 고갯길은 풍기와 단양을 잇는 죽령(689m), 문경과 충주를 잇는 새재(632m), 이화령(548m), 계립령(520m) 등이다. 계십령과 죽령은 삼국시대에 개척되었다. 새재는 이제 옛길이었지만 조선에서 마지막으로 개통되는 '새로운 길'이었다. 이화령은 세재의 옆구리를 쓸어버린 '신작로'이다. 다른 고갯길과 마찬가지로 특히 새재는 서울로 통하는 관문이었다.


조선 시대에는 한양(漢陽)이 전국을 연결하는 체제의 중심지였다. 6개 대로 중 하나인 이 길은 동래와 한양을 연결하는 가장 빠른 길로 개척되었다. 현재 경부고속도로에서 380km 떨어진 데 비해 서울에서 부산까지는 428km. 그래서 조선 시대 내내 세재는 영남대로의 대동맥 역할을 하며 당시의 수많은 사람들과 일본 등 외국 사신들, 우마차를 끄는 소까지 묵묵히 받아들였다.


조선 초기에는 새로운 건물이 들어서면서 도로망이 정비되었고, 곳곳에 역과 절이 설치되었다. 새재 너머에서 제일 큰 역은 유곡이었다. 조선 초기의 문신 홍귀달은 유곡역의 중요성을 기록하였다. "연경 남부 60개 주는 크고 인구와 재산이 많으며 수레와 말은 모두 계곡길로 모여야 서울로 갈 수 있고, 서울에서 남쪽으로 내려가는 사람들은 이곳을 지나야 갈 곳으로 갈 수 있다. 이 역할을 남에게 그려주면 영남의 목구멍이라고 할 것이다."

댓글